Posted On 2026년 02월 17일

다시, 길 위에 서다 – 바미안을 떠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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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는 날 아침, 일찍 일어나 바미안 계곡을 마지막으로 바라보았다. 새벽 빛에 절벽이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텅 빈 석불의 벽감도 부드러워 보였다. 상처마저 아름다울 수 있는 시간.

새벽녘 바미안 계곡의 고요한 풍경, 분홍빛 하늘 아래 절벽이 물들어 있다

사흘간의 바미안이 끝나간다. 짧았다. 이 복잡한 땅을 이해하기엔 턱없이 짧은 시간. 그러나 어떤 여행도 ‘충분’하지는 않다. 평생 한 곳에 살아도 그곳을 다 알 수 없듯이.

배낭을 꾸리며 생각했다. 여행이란 무엇인가. 사십 대의 나에게 여행은 더 이상 모험이나 탈출이 아니다. 확인이다. 세상이 여전히 넓다는 것, 내가 모르는 것이 무한하다는 것, 그리고 그럼에도 어디서든 인간은 비슷하게 살아간다는 것.

바미안에서 만난 사람들. 게스트하우스 주인은 탈레반 시절의 이야기를 했다. 담담하게, 그러나 눈빛에는 아직 그림자가 있었다. 시장에서 만난 양탄자 상인은 손녀 자랑을 했다. 카불에서 대학을 다닌다고. 희망을 말할 때 그의 얼굴이 환해졌다.

바미안 시장의 일상 풍경, 현지인들의 삶이 담긴 거리 모습

전쟁의 나라, 파괴된 유적, 위험 지역. 외부에서 아프가니스탄을 정의하는 단어들. 그러나 안에서 본 것은 달랐다. 가족을 사랑하고, 손님을 대접하고, 내일을 꿈꾸는 평범한 사람들. 다르지 않았다. 서울의 우리와.

공항으로 가는 차 안에서 창밖을 보았다. 양 떼를 몰고 가는 목동. 학교로 걸어가는 아이들. 밭을 일구는 농부. 삶은 계속된다. 정권이 바뀌고, 폭탄이 떨어지고, 세계가 등을 돌려도. 씨를 뿌리고, 아이를 키우고, 내일을 산다.

나는 다시 길 위에 선다. 바미안에서 카불로, 카불에서 서울로. 일상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돌아가는 내가 떠난 나와 같지는 않을 것이다. 여행은 그런 것이니까.

바미안이 내게 남긴 것들. 빈 자리의 의미. 침묵 속의 역사. 바람이 가르쳐준 천천함. 호수가 보여준 회복력. 그리고 무엇보다, 어디서든 살아내는 인간의 힘.

사십 대의 여행은 젊은 날의 여행보다 조용하다. SNS에 올릴 인증샷보다 혼자 새기는 문장이 많아졌다. 모험담보다 성찰이 늘었다. 그것이 나이 듦인지, 성숙인지, 아니면 그냥 지친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나는 아직 길 위에 서고 싶다는 것. 아직 보지 못한 곳이 있고,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이 있고, 아직 배우지 못한 것이 있다. 그것이 나를 계속 걷게 한다.

바미안, 안녕. 부서진 석불 대신 네 계곡의 사람들을 기억할게. 파괴된 과거 대신 이어지는 삶을 기억할게. 그리고 언젠가, 다시 올게. 그때 나는 또 다른 사람이 되어 있겠지.

길 위에서는 모두가 순례자다. 목적지가 어디든, 우리는 각자의 답을 찾아 걷는다. 바미안의 승려들이 그랬듯이. 실크로드의 상인들이 그랬듯이. 그리고 마흔넷의 내가 그러듯이.

다시, 길 위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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