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지리 시간에 배운 세계지도는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당시에는 국경선이 굵은 펜으로 그어진 채 색깔별로 구분된 국가들이 전부였다. 하지만 반도체라는 산업이 만들어낸 오늘날의 세계지도는 훨씬 복잡하다. 국경은 흐릿해졌고, 기술의 흐름은 강처럼 이어지며 때로는 댐처럼 막히기도 한다. 네덜란드의 작은 도시 페이르트호번에 본사를 둔 ASML은 이 지도의 핵심 교차로에 서 있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는 전 세계 반도체 공장의 심장부를 뛰게 만드는 기계다. 그런데 이제 그 심장에 미국이라는 외과의사가 수술을 제안하고 있다.
미국 의회가 추진 중인 법안은 ASML의 중국 수출을 더욱 제한하려는 시도다. 이 법안이 통과되면 네덜란드는 자국 기업의 중요한 시장을 잃게 되고, 중국은 첨단 반도체 생산에서 한 걸음 더 멀어질 것이다. 네덜란드 정부가 공식적으로 반대한 이유는 단순하다. 경제적 손실과 기술 주권의 침해다. 하지만 이 이면에는 더 깊은 문제가 숨어 있다. 반도체 산업의 글로벌 공급망은 이미 수십 년간 서로 얽힌 실타래처럼 복잡해졌고, 어느 한 나라가 이를 단독으로 통제하려는 시도는 실타래를 엉키게 만들 뿐이다.
기술 패권이라는 개념은 냉전 시대를 떠올리게 한다. 당시 소련과 미국은 서로의 기술 발전을 막기 위해 수출 통제를 강화했고, 그 결과는 양측 모두에게 비효율적인 자급자족의 길이었다. 오늘날 미국이 중국을 대상으로 한 반도체 수출 규제는 비슷한 패턴을 보여준다. 문제는 이 규제가 단순히 기술 유출을 막는 데 그치지 않고, 글로벌 공급망의 신뢰를 흔든다는 점이다. 반도체는 더 이상 한 국가의 산업이 아니다. 설계는 미국에서, 소재는 일본에서, 장비는 네덜란드에서, 생산은 대만에서 이뤄지는 분업의 산물이다. 이 중 어느 한 고리가 끊어지면 전체 산업이 마비될 위험이 있다.
기술은 국경이 없지만, 정책은 국경을 만든다.
ASML의 EUV 장비는 그 자체로 하나의 외교적 상징이다. 이 장비 없이 7나노 이하의 첨단 반도체를 생산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중국이 이 장비를 확보하지 못하면 인공지능, 5G, 군사 기술 등 미래 산업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 반면 네덜란드와 유럽은 ASML을 통해 기술적 우위를 유지하려 한다. 하지만 미국이 자국 법을 타국 기업에 강제 적용하려는 시도는 이 균형을 깨뜨린다. 유럽이 미국에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술 주권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 문제는 단순히 반도체 한 산업의 문제가 아니다. 기술 패권의 시대에는 모든 산업이 이 같은 딜레마에 직면할 수 있다. 클라우드 컴퓨팅, 인공지능, 양자 컴퓨터 등 첨단 기술은 이미 글로벌 공급망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다. 어느 한 국가가 이를 통제하려 들면, 다른 국가들은 자연스럽게 대체 공급망을 구축하려 할 것이다. 중국은 이미 반도체 자립을 위해 막대한 투자를 하고 있으며, 유럽도 최근 칩 법안을 통해 자국 산업을 보호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기술의 국경이 높아질수록, 세계는 더 많은 자급자족의 길로 들어서게 될 것이다.
하지만 자급자족이 항상 최선의 해결책일까? 반도체 산업의 역사를 돌아보면, 분업과 협력이 혁신을 이끌어낸 사례가 훨씬 많다. 1980년대 일본이 DRAM 시장을 장악했을 때, 미국은 보호무역으로 대응했지만 결국 기술적 우위를 되찾지 못했다. 대신 인텔은 설계 혁신으로 시장을 재편했고, 대만과 한국이 생산 역량을 키우며 글로벌 공급망을 형성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여전히 기술 리더십을 유지했지만, 그 기반은 자국 산업만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이제 미국은 다시 보호무역의 유혹에 빠진 듯하다. 하지만 이번엔 그 대상이 중국이고, 그 수단은 타국 기업에 대한 강제 규제다. 이 접근법이 단기적으로는 효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글로벌 공급망의 신뢰를 무너뜨릴 위험이 크다. 기술은 국경을 넘나들지만, 신뢰는 그렇지 않다. 한번 깨진 신뢰를 되살리는 데는 수십 년이 걸린다.
네덜란드의 반대가 단순한 경제적 이해관계에 그치지 않는 이유다. 이는 기술 주권과 글로벌 협력의 균형을 어떻게 맞출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반도체는 이미 단순한 산업 제품을 넘어 국제 정치의 도구가 되었다. 하지만 기술이 정치의 도구가 될수록, 기술 자체의 발전은 느려질 수밖에 없다. ASML의 EUV 장비가 상징하듯, 진정한 혁신은 협력에서 나온다. 한 국가의 법이 그 협력을 끊어버린다면, 우리는 모두 더 느린 미래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
이 뉴스를 접하며 든 생각은, 우리가 지금 지리 시간에 배운 것보다 훨씬 복잡한 세계지도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이다. 그 지도에는 국경뿐만 아니라 기술의 흐름, 자본의 이동, 정책의 영향이 얽혀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서 있는 우리는, 이 복잡한 지도를 어떻게 읽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기술 패권이냐 협력이냐의 선택은 결국 우리가 어떤 미래를 원하느냐에 달렸다.
더 자세한 내용은 Reuters의 원문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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