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리컨퍼런스(RightsCon)가 2026년 잠비아 개최를 취소한 결정은 단순한 일정 변경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기술이 사회를 재구성하는 속도가 빨라질수록, 그 기술이 뿌리내리는 토양의 정치적·윤리적 조건은 더욱 중요해진다. 이번 결정은 디지털 권리라는 추상적인 개념이 현실의 법과 제도, 그리고 권력 구조와 어떻게 충돌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특히 개발자 입장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기술의 중립성’이라는 신화가 얼마나 허약한 기반 위에 서 있는지 드러났다는 점이다.
잠비아 정부는 지난해 디지털 권리 및 개인정보 보호법을 개정하면서 ‘사이버 보안 및 사이버 범죄법’이라는 이름으로 사실상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조항을 강화했다. 이 법은 정부가 온라인 콘텐츠를 사전 검열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고, ‘가짜 뉴스’ 유포를 이유로 시민을 처벌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 문제는 이 법이 국제 인권 기준과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점이다. 유엔 자유권 규약 위원회는 이미 2022년 잠비아의 표현의 자유 제한이 과도하다고 경고한 바 있다. 그럼에도 정부는 법을 밀어붙였고, 그 결과 국제 사회의 신뢰를 잃었다.
기술 커뮤니티는 종종 ‘코드는 법이다’라는 말을 인용하며 기술이 가진 자율성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코드가 법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개발자가 아무리 중립적인 플랫폼을 설계하더라도, 그 플랫폼이 운영되는 국가의 법이 사용자의 권리를 침해한다면 기술은 곧 억압의 도구가 된다. 예를 들어, 종단간 암호화(e2e encryption)를 지원하는 메신저 앱이 있다고 해도, 정부가 암호화 키를 요구하는 법을 통과시킨다면 그 기술은 무력화된다. 기술의 중립성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만 유효한 개념일 뿐이다.
기술은 결코 진공 상태에서 작동하지 않는다. 그것은 항상 특정 사회, 특정 권력 구조 안에서 호흡한다. 개발자가 그 사실을 외면할 때, 기술은 의도치 않게 억압의 공범이 될 수 있다.
권리컨퍼런스의 결정은 또 다른 질문을 던진다. 기술 행사가 특정 국가에서 개최되는 것이 그 국가의 인권 상황을 ‘정상화’하는 효과를 낳지는 않는가? 많은 기술 콘퍼런스가 ‘글로벌’과 ‘포용’을 표방하지만, 그 행사가 열리는 장소 자체가 정치적 메시지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중국에서 열리는 AI 컨퍼런스에 참가하는 기업들은 그 행사를 통해 중국 정부의 검열 정책을 간접적으로 인정하는 셈이다. 마찬가지로, 잠비아에서 디지털 권리 컨퍼런스를 개최했다면, 그것은 잠비아 정부의 법이 국제 기준에 부합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이번 결정은 기술 커뮤니티가 가져야 할 책임의 범위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개발자는 단순히 코드를 작성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코드가 세상에 미칠 영향을 고민해야 하는 윤리적 주체다. 오픈소스 프로젝트가 전 세계에 퍼져나가는 것처럼, 기술은 국경을 넘나들지만 그 영향력은 국지적이다. 따라서 글로벌 기술 커뮤니티는 특정 국가의 법이 국제 인권 기준에 부합하는지, 그리고 그 국가에서 기술이 어떻게 활용될지를 끊임없이 모니터링해야 한다. 이는 기술의 발전을 저해하는 제약이 아니라, 기술이 인류의 자유와 권리를 증진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필수적인 장치다.
잠비아의 사례는 또한 ‘기술 외교’의 중요성을 부각시킨다. 기술 기업과 개발자 커뮤니티는 이제 더 이상 정부와 무관한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정부와 협상하고, 때로는 대립하며, 기술의 사회적 책임을 논의해야 하는 주체로 부상했다. 예를 들어, 애플이 중국 정부에 사용자 데이터를 제공하라는 요구를 거부한 사건이나, 메타가 유럽의 GDPR 준수를 위해 글로벌 정책을 변경한 사례는 기술 기업이 정부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보여준다. 권리컨퍼런스의 결정은 이러한 기술 외교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즉, 기술 커뮤니티가 특정 국가의 법과 정책을 ‘지지’하거나 ‘거부’하는 행위가 곧 외교적 메시지가 되는 시대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기술 커뮤니티는 두 가지 방향을 고민해야 한다. 첫째, 기술 행사의 개최지가 가지는 정치적 의미를 더 깊이 인식해야 한다. 단순히 ‘좋은 장소’를 찾는 것이 아니라, 그 장소가 기술의 가치를 얼마나 반영하는지를 평가해야 한다. 둘째, 기술의 윤리적 책임을 다하기 위한 글로벌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예를 들어, ‘디지털 권리 준수 국가’ 목록을 만들고, 그 국가에서만 기술 행사를 개최하는 방안을 고려할 수 있다. 이는 기술의 발전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이 인류의 자유와 권리를 증진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안전장치다.
기술이 사회를 바꾸는 힘이 커질수록, 그 기술이 뿌리내리는 토양의 건강성은 더욱 중요해진다. 권리컨퍼런스가 잠비아 개최를 취소한 결정은 기술과 인권, 법과 윤리가 어떻게 얽혀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개발자라면 이 사건을 단순히 뉴스의 한 줄로 넘기지 말고, 기술이 가진 책임의 무게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아야 한다. 기술은 중립적일 수 있지만, 그 기술이 작동하는 세상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권리컨퍼런스의 공식 성명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포스팅은 쿠팡 파트너스 활동의 일환으로, 이에 따른 일정액의 수수료를 제공받습니다.